이제 『인간은 미덕을 추구하도록 태어났다』 와 『사람은 고난을 겁내면 안 된다』를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덕을 쌓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인내와 노력을 두려워하면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미덕을 추구하도록 태어났다
그는 말하곤 했는데, 우리는 모두 본성에 의해 실수 없이 고귀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특별한 누구만이 아닌 모두가 그렇다고 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명확한 증거는 입법자들이 모두에게 해야 할 일과 금해야 할 일을 정하며, 악행을 저지르거나 위반한 사람은 젊었든 늙었든, 강자든 약자든 누구든지 처벌에서 제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덕의 모든 개념이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이라면 태생적으로 미덕의 일부를 공유한 것은 아니다. 마치 다른 기술과 관련된 활동에서 기술을 배우지 못한 자에게 오류가 없을 것을 기대하지 않듯이, 삶의 행실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우리를 실수에서 구하는 유일한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면 미덕을 배우지 못한 자가 오류가 없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제 병자를 돌볼 때 우리는 의사에게만 실수를 하지 않기를 요구하며, 리라를 타는 기술도 음악가에게만 요구하며, 조타 장치의 조종은 조타사에게만 요구한다. 하지만 삶의 행실에서 오직 철학자에게만 실수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설령 오직 철학자만이 덕을 연구하더라도 미덕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행실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미덕을 추구하도록 태어난 것에 대해 이것 외의 다른 설명은 분명히 없다. 이것은 우리 본성에 선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며, 모두가 자신이 선하고 덕이 있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을 보자. 그에게 우둔한지 총명한지 물을 때 아무도 우둔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물어보면 정의롭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제하는지 무절제한지 물으면 즉시 자신은 절제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끝으로 그에게 선한지 악한지 물으면 선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미덕 교사의 이름을 말할 수 없거나 미덕에 대한 자신의 어떤 연구나 실천도 언급할 수 없더라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이 선과 고귀함을 향한 인간 영혼의 선천적 성향과 우리 개개인 안에 미덕의 씨앗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선은 우리에게 완전히 이로운 것이기에 우리 중 몇몇은 자신이 진실로 선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어떤 이는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인정하길 부끄러워한다.
그러면 왜 글자나 음악 또는 체조를 배우지 않은 이들이 그런 기술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걸 아는 체도 하지 않는데 자신이 배운 교사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어째서 자신이 덕이 있다고 공언하는 것인가? 그 어떤 다른 기술도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인간도 그것을 위해 타고난 능력이 없지만, 미덕에 대한 성향은 우리 각자에게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고난을 겁내지 말라
미덕과 선을 위해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난을 더 쉽고 즐겁게 버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무가치한 목적을 위해 어떤 고난을 견디는지 생각하는 것이 유용하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무절제한 연인들이 악한 욕망을 위해 어떤 일을 겪는지, 어떤 이는 이익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명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디는지 생각해보고, 이 모든 이가 자발적으로 온갖 수고와 고난을 감수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무런 명예로운 보상도 없이 그런 것을 견디는 것은 괴상한 일이 아닌가? 반면에 이상적인 선, 즉 삶을 파괴하는 악을 피하면서 또한 모든 재화의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미덕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고난을 견딜 준비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 애쓰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돈을 위한 고난을 견디는 대신에 원하는 것을 줄이도록 자신을 훈련하고, 악명을 얻기 위해 고생하는 대신에 그 악명을 좇지 않으며,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에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아첨꾼처럼 노예가 되지 않고 거짓 친구를 사귀는 대신에 전정한 친구를 갖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지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노동과 고난은 더 나은 목적을 추구하는 자와 더 나쁜 것을 추구하는 자 모두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든 노력이 보상에 조금의 희망이 있는 자들의 노력보다 훨씬 열심이지 않은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곡예사들은 어려운 일을 개의치 않고 마주하고 목숨을 걸고 공연하고,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 공중제비를 돌거나 높은 높이에 설치된 줄 위를 걷고, 한 번 헛디디면 죽는 공중에서 새처럼 날아간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작은 보상에도 하는데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 고난을 겪을 준비가 왜 안 되는가?
우리 여생에서 좋은 일 중에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한 목표는 분명히 없다. 어떤 동물의 특성이라도 합리적으로 성찰한다면, 우리의 고난에 대한 인내심이 부끄러워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알고 굳건히 견디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우리가 친구를 돕거나 도시에 이로움을 주거나 아내와 자식을 지키거나, 최고이자 가장 시급한 목표인 선하고 정의롭고 자제심을 갖는 상태가 되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훨씬 적절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 노력하기를 꺼리는 자는 거의 언제나 선을 이룰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생을 통해 모든 선을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