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험을 넘어서
자아에 대한 이해는 엄청난 지성과 대단한 조심성과 기민함, 끊임없는 관찰이 필요하며, 그래야 사라지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자아를 없애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자아를 소멸하는 것이 가능함을 안다.
조금만 참기 바란다. 『난 이걸 없애고 싶다』라고 말하는 순간과 그 소멸을 위한 과정을 따르면서 자아를 경험하며, 그것으로 인해 자아는 강화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아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창조는 자아의 경험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창조란 자아가 없을 때 생겼으며, 지성에서 나오거나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자아가 투영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듯이 모든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아주 고요할 수 있을까? 즉 비인식의 상태, 창조가 일어날 수 있는 상태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아가 없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내 말을 이해하는가?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마음의 움직임도 사실은 『나』를 강화하는 경험이다.
마음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완전한 침묵이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지만, 자아를 경험하고 따라서 자아를 강화하는 침묵은 아니다.
자아란 무엇인가?
권력, 지위, 권위, 야망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자아의 형태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고, 당신과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덧붙여,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해진다면 당신과 내가 각각 특정한 계층이나 특정한 사회, 특정한 기후대에 있는 한 집단에 속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에 따라 행동하면 나는 진정한 혁명이 일어날 거로 생각한다.
그것이 보편화하고 더 체계화된 순간, 자아는 거기로 도피할 것이다. 반면에 개인으로서 당신과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일상에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정말 중요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자아를 통해 내 말을 이해하는가? 내 말은 생각이나 기억, 결론, 경험과 이름 짓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의도를 뜻하며, 또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의식적인 노력과 무의식의 축적된 기억과 인종, 집단, 개인, 가문과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외부로 표출하여 행동하든지 영적인 미덕으로 드러나든지, 이 모든 것을 추구하는 뒤에는 자아가 있다.
거기에는 경쟁과 존재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 모든 과정이 자아이다. 우리가 그것과 직면하면 그것이 악한 것임을 실제로 알게 된다. 나는 악하다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자아가 분리하며 스스로 고립하니, 그 행동이 아무리 고귀해도 분리하고 고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안다. 우리는 또한 자아가 없는 순간은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그때는 노력이나 분투의 느낌도 없으며 사랑이 있을 때 그렇게 된다.
사랑이 있으면 자아가 없다
실상이나 진리는 인지할 수 없다. 진리가 오려면 신념, 지식, 경험, 미덕과 미덕의 추구 (미덕의 추구와 미덕이 있는 것은 다르다) 이 모두가 사라져야 한다. 덕을 닦는 것을 의식하는 덕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실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품위 있는 사람일 수 있지만 진리의 사람, 즉 이해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진리의 사람에겐 진리가 존재에 온 것이다. 덕 있는 이는 의로운 사람이고, 의로운 자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미덕이란 자아를 감싸고 강화하는 것이며, 그는 미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탐욕을 없애야 해』라고 말할 때, 그가 탐욕이 없다고 경험하는 상태가 자아를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은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신념과 지식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속세의 부자나 지식과 신념이 풍부한 사람은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며, 모든 해악과 불행의 중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개인적으로 이 모든 자아의 작용을 볼 수 있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단언하건대 그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개혁이다. 사랑은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사랑을 알지 못한다.
『사랑한다』라고 말해도 그 말을 하거나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알면 자아는 없다. 사랑이 있으면 자아는 없다.
무엇에 대한 이해
인생을 이해하는 이는 당연히 신념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신념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는 자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지성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지성은 항상 안정과 보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항상 위험을 피하고, 따라서 지성은 관념이나 신념, 이상을 세워서 그 뒤로 피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폭력과 정면 대응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당신의 사회에 위험이 될 것이며, 마음은 위험을 예견하기에 『나는 십 년 후 비폭력의 이상을 이룰 것이다. 그것은 허구이고 거짓된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이상은 거짓이기 때문에 무엇이 진짜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을 만들고 따르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과 유연하고 편견 없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많은 탈출 방법을 발명하고 그들에게 이상, 신념, 신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이는 것을 직시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거짓을 거짓으로 볼 때만 우리 마음은 무엇이 진실인지 인식할 수 있다. 거짓 속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은 결코 진실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관계와 관념, 나에 대한 것들에서 무엇이 거짓인지 알아야 한다. 진실을 인식하려면 거짓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는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깨닫지 못했을 때 깨달음을 찾는 것은 극히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관념, 사람, 사물과의 관계에서 거짓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마음이 거짓을 볼 때 진실한 것이 생겨나고 환희에 이르면 행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