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 아난다마이 마의 가르침 모음집 『사드 바니』를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그녀의 추종자인 브하이지가 녹음하고 아트마난다가 번역한 이 책에서 헌신적인 성자는 일상생활에서 영성을 수행할 기회를 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나를 보러 오는 사람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제 방문이 당신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그들이 그런 질문을 쉽게 입에 올리는 것은 나와 떨어져 있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 형제자매를 보고 싶을 때 이런 배려가 마음에 떠오르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며, 방문으로 조금 불편해도 개의치 않는다. 나의 이 육신이 당신들 모두의 것임을 안다면 내게 올 때 그런 망설임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를 가든지 온 마음과 영혼과 함께 가면 아무도 낯설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나를 보러 오라. 지고한 기쁨의 신의 현신인 당신들 모두를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위대한 한 분 아버지의 창조물이기에 모두가 친구이자 친척이다.
한 대가족의 자녀들이 생계를 위해 십여 개의 다른 직업을 선택하듯이, 십여 개의 다른 장소에 자신의 집을 짓고 정착하듯이,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다양한 명칭 아래 다양한 활동 방향의 요구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분류된다.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해 역증요법, 동종요법, 아유르베다 등 많은 의학 체계가 존재한다. 각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출생과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는 인간의 병든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경전에서 발견한 정교한 처방과 현자와 성자들로부터 직접 배운 많은 규칙과 규정이 있지만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졌다.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비슈뉴파 교도 등이 따르는 다양한 길은 결국 모두를 영원의 문턱으로 이끈다. 기차역 입구에는 많은 소란과 소음, 많은 밀기와 밀쳐짐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승강구에 도착하면 모든 사람의 목적지가 정해진다.
주인과 종은 분리된 형상이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주인이 무한한 자비로 육신으로 내려오실 때 종이 된다.
주인이 없다면 종이 있을 수 없듯이, 주인은 또한 종에게 의지한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영원한 상호관계가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주인은 종이 헌신을 바칠 유일한 대상이다. 반면에 주인은 종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신의 충만함과 전체성 안에 있으면 주인이고 신이 분열하셔서 나타나면 종이 된다. 다시 말해서 종은 주인의 일부가 현신한 것이다.
당신은 봉사를 아주 자랑한다. 그건 쓸데없는 말이다. 진정한 종은 하누만, 가루다나 그들과 같은 다른 존재로 주인과 자신을 온전히 동일시했기에 더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봉사에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 즉 재산, 가족, 친구, 정신, 마음, 몸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칠 수 없는 사람은 주님의 참된 종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 세상은 단 한 명의 연주자가 있는 북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이 내는 리듬은 신의 뜻에 달려 있다. 신을 찬양하며 노래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악의 리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지 보았는가? 하지만 악기나 연주자에 대해 생각하는가?
이 땅에서 진정한 기쁨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한 행복으로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은 모든 기쁨의 근원이신 신을 아는 데 관심이 없다. 만물의 근원인 신을 찾으라. 이것이 진정한 고행이고 이것이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사람들은 종종 재가자의 삶을 살면서 영적 진보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재가자에겐 일상에서 종교를 실천할 기회가 얼마나 많은가! 부모의 애정, 형제자매의 애정, 남편과 아내의 사랑, 부모에 대한 자식의 존경과 헌신, 친척과 친구 간의 교제, 하인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축복은 모두가 삶에서 궁극의 목표인 깨달음을 향한 강력한 도움이 된다.
잘 생각해보면 이것을 이해할 것이다! 가정생활의 시련과 즐거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다 보면, 때때로 인간 안에서 출가의 정신이 신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과 함께 깨어난다. 그렇다면 재가자는 가정을 떠난 많은 은둔자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영원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족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거나 몸이 불편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즉시 의사와 상담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또는 세상사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지 생각하라!
그러나 신께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 포기하고 무릎에 손을 모으고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의 은총을 기다린다. 이것이 요가수행자인가? 만약에 열정이 깨어난다면 충분히 집중할 수 있다.
몸을 건강하고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똑같이 노력한다면, 당신의 열망이 얼마나 진실하고 열렬하게 자라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앉아서 이론에 치우치면 아무데도 이르지 못한다. 이론적 지식을 실제로 적용하고 사다나(영적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집중하면 그것이 행동을 통해 목표에 이르는 비결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