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는 시간이 있기 전에 써졌기에 공기가 음악인 그 영역에 침투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일 때마다 우리는 그 태고의 노래를 듣고 적어보려고 하지만, 때때로 한 마디 또는 한 구절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며 시를 잘못 적는다. 보다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들은 이 운율을 더 충실히 받아 적고, 이 필사본은 불완전하긴 해도 열방의 노래가 된다. 자연은 선한 만큼 아름답거나 합리적인 만큼 아름다우며, 행하거나 알려져야 하는 만큼 나타나야 한다. 말과 행동은 신성한 에너지의 낮은 방식이다. 말은 행동이기도 하며 행동도 일종의 말이다.
시인의 표식과 자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하고 유일한 의사이며; 알고 말한다. 유일한 소식 전달자인데, 자신이 묘사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의 관찰자이자 필요한 것과 인과적인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시적 재능이나 운율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 […]
우리의 시인은 음악의 아이가 아니라 노래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논증은 부차적이고 구절의 마무리가 중요하다. 시를 만드는 것은 운율이 아니라 운율을 만드는 논쟁이 시를 만든다. 생각은 너무나 열정적이고 생동적이어서 식물이나 동물의 정신처럼 자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자연을 새로운 것으로 장식한다. 생각과 형식은 시간의 순서로 보면 동등하지만, 생성의 순서로 보면 생각이 형식에 앞선다. 시인은 새로운 생각이 있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펼치면서, 그 경험이 어떠했는지 말해주며, 모든 사람은 그의 행운으로 더 부유해질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경험은 새로운 고백을 필요로 하고 세상은 항상 시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 […]
바로 오늘, 이 지붕 아래 당신 곁에서 시를 썼음을 아는 것은 큰 일이다. 뭐라고! 그 멋진 정신이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이 돌 같은 순간은 여전히 반짝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나는 신탁이 모두 침묵했고 자연은 그 불을 다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라! 밤새도록 모든 구멍에서 이 아름다운 오로라들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시인의 출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줄지 모른다. 우리는 세상의 비밀이 심오한 것은 알지만, 누가 무엇이 통역자가 될지는 알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