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기원전 470년경 태어났지요. 많은 사람이 그를 서구 철학의 아버지라 여기며, 어떤 사람은 그를 통찰력 있는 교사이자 깨달은 스승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인생 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그의 사후에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기록했습니다. 이들 제자는 여러 권의 책 속에 스승을 묘사했는데,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입니다.
플라톤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적 저술 중 하나는 『국가』입니다. 주로 정의에 관해 소크라테스와 사람들 사이의 소중한 대화와 더 높은 지식을 얻기 위한 철학자의 여정을 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지상에서 개개인의 주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족, 직업, 사회적 책임에 집중하고 있으나 사실 자기 영혼의 행복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으로 소크라테스는 채식을 따르고 장려했습니다.
오늘은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통해 진실하게 다스리는 수호자와 또한 사람들을 『진정한 존재에 대한 관조』로 이끄는 지식의 종류에 대해 사색하겠습니다.
미래의 통치자에게 통치자의 삶과 다르고 그보다 나은 삶을 주려고 노력한다면, 그때 질서 있는 국가를 가질 수 있다네. 이것을 제공하는 나라만이 금과 은의 부유함이 아닌, 덕행과 지혜의 진정한 부유함을 가진 자가 다스리게 되고, 그것이 삶의 진정한 복이라네. 반면에 그들이 공적인 정치에 가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가난하고 굶주리면서, 이 때문에 최고선과 질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네. 그들은 직위를 싸울 것이며, 국가와 가정에 다툼이 생기고, 그리하여 자신과 나라 전체의 몰락을 부르게 되네.
글라우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치적 야망의 삶을 무시하는 유일한 삶은 진정한 철학의 삶이라네. 자넨 다른 삶을 아는가? 글라우콘은 모른다고 했다. 또한 통치자는 통치를 원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통치를 원하는 자라면 상대편의 경쟁자가 있어 싸우게 될 것이네.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호자가 되도록 강요할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은 국정에 대해 가장 현명하며, 국가를 가장 잘 관리하고 동시에 다른 명예를 가지며 정치가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며, 정치가의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일 것이다. 글라우콘은 그들이 적당한 자이며, 그들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이제 그러한 수호자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지, 어떻게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데려올지 생각해 보세. 어떤 이들은 낮은 세상에서 신으로 승천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글라우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그 과정은 영혼이 밤보다 낫지 않은 낮에서 존재의 진정한 낮, 즉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한 철학이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지식이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주는지 질문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 영혼을 존재로 이끌 것인가? 우리의 예전 교육 구성에는 두 부분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 육체의 성장과 부패를 주관하는 체육이 있었으니, 이것이 생성과 부패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지식이 아닌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전 교육구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음악은 어떠한가? 글라우콘이 말했다. 기억하시겠지만 음악은 체육과 짝을 이루어 습관의 영향과 조화를 통해 수호자들을 훈련시켰고, 주기적인 리듬으로 그들을 조화롭게 해도 학문을 주진 못합니다. 그리고 말은 상상이든 사실이든 그 안에 리듬과 조화와 비슷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는 당신이 지금 찾는 그 선을 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자네의 기억은 정확하네. 음악에는 분명히 그런 것이 없다네. 하지만 글라우콘이여, 어떤 부류의 지식이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가졌는가? 우리가 모든 유용한 예술은 천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만일 음악과 체육을 배제하고 예술들도 또한 배제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우리의 특별한 주제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네. 그러면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적으로 적용할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네.
그것이 무엇인가? 모든 예술과 학문, 지성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교육의 요소들 사이에서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 둘 셋을 구분하는 사소한 문제로, 한 마디로 숫자와 계산이네. 모든 예술과 학문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필요합니다. 내가 보기에 산수는 우리가 찾고 있는 종류의 학문이며 자연스럽게 사색으로 이끌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네. 산수의 올바른 사용은 영혼을 단순히 존재로 이끄는 것이네. 감각의 대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말이네. 어떤 감각은 감각을 충분히 판단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네.
반면에 다른 감각의 경우에는, 감각을 전혀 믿을 수 없기에 더 많은 조사가 확실히 요구된다네.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감각이란 하나의 감각에서 반대로 전달되지 않는 감각을 의미하네. 후자의 경우인 생각하게 하는 감각은 대상에서 오는 감각으로,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없이 그 반대의 감각보다 특별히 더 생생한 인식을 주지 않는다네. 하나의 예가 내 의미를 더 분명히 알려줄 것이네. 여기 세 손가락이 있네. 새끼손가락과 검지와 중지가 있다네. 이것들은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네. 여기 요점이 있네. 그것은 무엇인가? 각각의 손가락은 중간에 있든 끝에 있든 상관없이 손가락으로 보이며, 하얗든 검든 두껍든 가늘든 상관없이 손가락은 모두 손가락이네.
이런 경우에 사람은 『손가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네. 왜냐하면 손가락을 다른 것으로 보는 마음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우리가 예상하듯이 거기에는 지성을 써야 하거나 자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손가락의 크고 작음은 똑같은 진실일까? 시각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한 손가락은 중간에 있고 다른 손가락은 끝에 있는 상황에 의한 차이는 없는가? 마찬가지로 촉각이 손가락의 두꺼움과 얇음, 또는 부드러움이나 딱딱함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는가?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네. 그들은 그런 물질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주는가? 그들의 작용 방식은 딱딱함의 정도와 관계되는 감각이 반드시 부드러움의 정도와 관련이 있고, 영혼엔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 둘 다가 같은 것으로 느껴짐을 암시할 뿐이네. 글라우콘은 맞다고 답했다.
영혼이 부드러우며 또한 딱딱한 느낌을 주는 이런 느낌에 당황하면 안 되는가? 다시 말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은 무슨 의미이며, 가벼우며 또한 무겁고, 무거우며 또 가볍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글라우콘이 말했다. 예, 영혼이 받는 이러한 느낌은 매우 이상하며 설명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렇네, 이 복잡함 속에서 영혼은 당연히 계산과 지성을 동원하게 되며, 자신에게 알려진 몇몇 대상이 하나인지 둘인지 알게 될 것이네. 만약 그것이 둘로 판명된다면 그 각각은 서로 다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만일 각각이 하나이며 둘은 두 개라면 영혼은 그 둘을 분리된 상태로 생각할 것이네. 만약 나뉘지 않았다면 그들을 하나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눈은 분명히 작고 큰 둘을 보지만 혼란스럽게만 볼 것이며, 그것은 구별되지 않네. 반면 사고하는 마음은 그 혼란을 밝히기 위해 과정을 되돌려야 하며, 작은 것과 큰 것을 혼돈하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하네. 이것이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으냐는 질문의 시작이 아닌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것과 지적인 것에 구별이 생겨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