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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엔네아데스: 참된 행복에 대하여 플로티노스(채식인), 2부 중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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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5장

『하지만 타고난 활동을‍ 방해하는 슬픔과 질병, 다른 모든 것은 어떤가요? 우리가 듣기로 현자는‍ 이런 고통을 견디고 심지어‍ 가볍게 받아들이지만 절대 고통을 선택하지 않고 마땅히 행복한 삶을 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현자는 단순한‍ 현자의 영혼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존재의 총합에서‍ 육체적 원칙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서 육신이 간청하고 갈망과 증오가 육체를 통해‍ 내면의 인간에게‍ 스며들 때까지 모든 걸‍ 용감하게 수용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즐거움을 포함해야 하기에 불행이나 고통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런 자족하는‍ 지복의 상태는‍ 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내면에 고귀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에 한 부분만이 아닌‍ 존재 전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한 구성요소가 어려움을‍ 겪으면 다른 요소가‍ 동료의 고통에 답하며‍ 그 활동에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 육체나 육체의‍ 감각적인 삶을 잘라내고‍ 그렇게 하여 행복에 필수적인 자족함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6장‍

『만약 행복이 정말로‍ 고통, 질병, 불행, 재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한다면 그런 시련에‍ 직면한 어떤 사람도‍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참된‍ 선의 결실에 있다면‍ 왜 이 조건을 외면하고‍ 수단으로 시선을 돌리며‍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다양한 것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나요? 그 어느 것도‍ 행복으로 향하지 않는데요.

사실 만약, 바람직하고‍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쌓아 올려야 행복을‍ 얻는다면 우리도 거기에 합류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구가 조건이나 조건이 아니라면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갈망을 향하는 궁극적이고‍ 가장 고귀한 것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탐구와 영혼의 의지는‍ 이 영역에서 해방을 직접 가리키진 않습니다. 이 삶에 대한 우리 관심을 없애려고 수련하는 이유는 이 질서에 속한 것과‍ 근원적 대립을 피하는 겁니다.

단지, 그 간섭에 분개하며 심지어 때로는 그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열망은‍ 악에서 멀지 않습니다.

영혼이 가장 높고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것만큼요. 이것을 성취하면 모든 걸‍ 얻으며 안식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의지가 강한 삶의 상태입니다.

엄격한 의미로 의지를 보자면 필수적인 것을‍ 획득하려는 「의지」는‍ 없으며 단지 필요를‍ 인식하는 것을 의지로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불쾌한 것을‍ 피하는 것은 확실하며‍ 그러한 회피를 우리가‍ 분명히 의도해선 안 됩니다. 그런 회피가 우리 취향에 더 맞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 것이 되자마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령 건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 어떤 대단한‍ 매력이 있는가요?‍ 우리는 그것을 갖는 순간부터 중시하지 않습니다.

현재 매력이 없고‍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은 없다면 불편하기에 부족하면 원하지만 합리적으로 그것을 필수품이라고 불러도 선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코 최종 목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이러한 쾌적한 상태가 아닌 정반대의 상황이라도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있어야 합니다』‍

제1 엔네아드, 4편: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7장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이 이런 상황은 원하며‍ 행복과 상충하는 것은 거부할까요?‍ 우리의 답은 이렇습니다:‍ 더 즐거운 상태가 사실 현자의 행복을 조금도 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존재의 통합성에 도움이 되며 대립하는 것들은 그의 존재에 반하거나‍ 조건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현자가 성취한 조건은 쉽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높은 선을 가진 이가‍ 단순히 그것만을‍ 원하며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들어온다고 선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그 곁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경우든‍ 행복을 얻은 이가‍ 선택하지 않은‍ 운명의 전환을 맞더라도 그것에 대한 행복은‍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행복은‍ 하루하루 방향을 바꾸거나‍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녀가 죽거나 적은 재산을 잃어도 그는 우울해지겠지요. 아닙니다. 천 가지 불행과 실망이‍ 그에게 닥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는 여전히 평온할 것입니다.

나무와 돌이나 인간들 사이의 죽음을 중시하는 사람은 아직 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현자는 죽음을 육신의 생명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자신이 제사의 제물이 되면 어떨까요?‍ 제단 옆에서 죽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할까요? 만약 매장하지 않으면요?‍ 그의 시체를 매장하든 땅 위에 두든지 결국‍ 썩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호화로운 장례식도 없이 몰래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혀 큰 비석조차 필요 없다고 여길까요?‍ 완전히 하찮게요!‍ 만약 적의 손에 넘어가‍ 감옥에 가면 어떨까요?

만약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더라도 탈출하는 길은 항상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본질은 지나가는 것이며 인간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성찰할 것입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에‍ 갇힌 상태는 분명히‍ 이로움이 있을 것이며 고통받는 이들은‍ 자유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들이 머문다면‍ 머무는데 이유가‍ 있을 것이고‍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혹은 그들이 머물러선‍ 안될 때 이성에 반하여 머무른다면 자신을‍ 탓할 것입니다.

이웃의 어리석음이 아무리 가까이 오더라도‍ 현자를 악에 빠뜨릴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다른 이의 선악이‍ 그의 상태를 좌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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