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 화신을 사용하여 나타나실 수 있다고 읽었어요.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용어로 편재한다고 불러요. 무소부재, 그렇죠? 네 보다시피,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말을 합니다. 힌두교도 무소부재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것은 여러분이 동시에 언제나 어디나 있고 여기도 있다는 뜻이죠. 그것이 무소부재함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런 무소부재함을 얻을까요? 네, 가능해요.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랬죠. 여기 있는 다른 누군가도 가능해요.
단지 우리가 천국을 알고, 소유하고, 사용해야 그것이 유용해집니다.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을 백 년, 천 년, 백만 년 억만 년을 가지고 다닌들 여러분을 단지 하나의 인간, 벌레, 사자나 호랑이 주민으로 만들죠. 그것이 뭐든 말이에요.
우리가 이 천국을 알아야 하며, 내가 여기까지 와서 여러분이 자기 보물을 알도록 알려주는 일과 같아요. 믿든 아니든 난 여러분의 지혜에 기댈 뿐입니다. 하지만 입문 후에는 즉시 증거가 있기에 믿기 쉬워요. 그리고 매일 더 많은 증거가 있고, 매 순간 더 많은 증거가 있어요. 매 순간 여러분은 다른 세상,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가죠.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 내 친구가 방금 말했듯이 환경이 변한 게 아니라 그녀가 변한 거죠.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든, 물질적 안락함을 얼마나 누리든, 우리는 모두 똑같이 불행을 느껴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여전히 고민을 해결해야 해요. 이 고민은 돈으로 없앨 수 없어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백만장자가 자살하는 것을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보죠. 수많은 위대한 사람이 이 세상의 짐을 못 견뎌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요. 자신의 영원한 보물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은 덧없는 보물에 의지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말씀하길, 『너희의 보물을 땅에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녹이 썩게 하니 영원히 지속하는 하늘에 너희 보물을 두라』 자신만의 보물, 영원한 보물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항상 근원에서 끌어낼 수 있고 항상 공급될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은 무한하고 무한한 축복입니다.
반복해 말하지만, 그것을 소위 광고할 말은 없어요. 찬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내 찬미를 믿기를 바랄 뿐이며, 나의 소위 방사, 에너지, 자기장이 어떻게든 여러분 마음에 영향을 주어 그런 즐거운 느낌으로 고양하길 바랄 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든 믿을 것이고 입문 후에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 수 있어요.
지금은 여러분이 맛보지 못한 「과자」를 광고만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과자」는 무료죠. 그러니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진심인 걸 증명하기 위해 여러분의 집에 가서 청소라도 하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나의 진심과 이타적인 봉사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분 구두를 닦으라고 한다면 즉시 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큰 축복, 내가 나눌 권리가 있는 이 큰 축복을 여러분에게 전할 길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게 그걸 주시고 또한 권리도 주셨죠. 오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어떤 조건이나 물질적 욕심도 없이 같은 것을 나누도록 허락하셨어요.
이제 어느 정도 소통이 된 것 같아요. 나의 진심을 느꼈나요? 계속할까요? 아니면 벌써 잠들었나요? (아니요) 잠들지 않았군요. 그러면 몇 마디 더 말한 다음 질문할 수 있게 하겠어요. 어떤 질문이든 괜찮아요. 내가 말할 때 질문이 떠오르면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내게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어떤 질문에도 답해드리겠습니다.
예전엔 이 법문을 몰랐고 수행하지 않았어요. 지혜의 이 위대한 축복을 접하지 못했어요. 많은 것을 시도했었어요. 온갖 사회사업도 했죠. 여기 계신 여러분처럼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도움을 줄수록 나는 더 바빠지고 충분히 돕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많이 도울수록 더 많은 사람이 요구하는 것 같았죠.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이 있는데 세상은 너무 넓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것처럼 느꼈어요. 혼자서 또는 백 명이라 해도 그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없었죠.
그러다가 생각했죠. 예수님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까? 부처님은 어떻게 사람들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계실 수 있었을까? 매우 열심히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죠, 『나는 몸집도 매우 작고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으니 안 될 거야, 어느 정도 하다가 그 다음엔 쓰러지겠지』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기에 쓰러지지 않고 그리 많은 사람을 도왔을까요? 난 경전을 읽었어요. 불교 교리, 경전요. 수트라는 교리나 경전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예요.
나는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 화신을 사용하여 나타나실 수 있다고 읽었어요.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용어로 편재한다고 불러요. 무소부재, 그렇죠? 네 보다시피,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말을 합니다. 힌두교도 무소부재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것은 여러분이 동시에 언제나 어디나 있고 여기도 있다는 뜻이죠. 그것이 무소부재함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런 무소부재함을 얻을까요? 네, 가능해요.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랬죠. 여기 있는 다른 누군가도 가능해요. 말하진 않겠어요. 누군지 짐작 되나요? (네) 짐작할 수 있죠. 말하지 않겠어요. 부끄럽군요.
누가 편재할 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나요? 대단하지 않나요? (대단합니다) 그렇죠. 우린 부처님만 할 수 있고 예수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수백만 생에 단 한 번만 나타나고 예수님도 많은 생애에 단 한번 오셨다고 생각해요. 그건 논리적이지 않아요. 마치 인간이 어느 시대 어느 기간에나 병을 앓는 것과 같아요. 따라서 모든 시대에 의사가 있어야 하고, 병을 치료할 의사가 있어야 해요.
인간은 고대로부터 정신적 불만으로 고통받았어요. 이것은 일종의 병이죠. 우리 몸에 병이 있으면 낫기 쉬워요. 약을 먹고, 수술받고, 주사를 맞고, 그러면 돼요. 우리는 괜찮아요. 하지만 정신적 고통은 아무도 치유할 수 없어요. 삶의 압박이 주는 매일의 번뇌는 누구도 덜어줄 수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수십억, 수십억, 수십억 생애에 한 번만 얼굴을 내밀고 축복을 주셨다면… 사실, 대다수의 사람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바는 그분이 단 한 번만 출현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문명이 내게 가져온 것은 바로 에어컨입니다. 나는 대만(포모사)의 시골에 사는데, 야외에서 살아요. 텐트에서 살죠. 우리 모두 텐트에서 살며 우리 사원도 텐트죠. 우리는 돈을 낭비하고 시끄럽게 하는 사원을 짓지 않아요. 그래서 텐트에서 살고 매일 야외에서 생활해요. 그런데 에어컨이 있고 만석인 점보제트기에 갇혀 있다가 바로 감기에 걸렸어요. 이것이 문명의 이점이죠, 피할 수 없어요. 난 너무 예민하거든요.
따라서 정말 나의 예를 보지 마세요. 나를 보면 너무 작고, 너무 마르고, 아파요. 이 법문을 수행하는 것이 소용없다고 생각하겠죠. 오, 그것은 어디든 유용하고 온갖 쓸모가 있어요. 단지 스승인 경우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스승은 줄 수만 있고 받을 수가 없어요. 그게 차이점입니다. 제자들은 아주 편안하며 온갖 기쁨과 행복, 축복을 누려요. 하지만 스승은 고통받아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인류를 고양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오셨고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어떤 특권도 누릴 수 없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꾸짖고 십자가에 못 박고 비난했어요. 부처님도 마찬가지였지요. 부처님도 병에 걸리고 사람들의 비난과 온갖 사소한 일로 고통받았죠. 어쨌든 겁내지 마세요. 이 법문을 배우면 여러분은 신의 힘으로 무조건 100% 보호됩니다. 스승은 예외죠. 스승은 온갖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그게 차이점입니다. 스승 홀로 고통받아야 해요. 다른 모든 사람은 즐기죠. 하지만 이게 바로 부모가 되는 기쁨입니다.
부모가 되는 기쁨과 같아요. 아이들은 모든 안락함을 누리는데, 부모는 열심히 일하며, 모든 것을 주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해요. 부모가 된 것에 불평하지 않듯이 어떤 스승이 되면 불평해서는 안 돼요. 참 스승은 고통받아야 해요. 그러니 문제없어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죠? 그 전에 무슨 말을 했죠? 그 전에 무얼 말했나요? 감기를 말하기 전에 무슨 얘기를 했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요) 네, 하지만 그건 고통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죠. 그전에는 무얼 말했죠? (텐트에 사신다고요… ) 아, 나는 텐트에 살아요. 아니요, 그것도 고통에 포함됩니다. 그 전에 뭐였지요? (인과응보요) 인과응보. 네, 무소부재입니다. 좋아요. 누가 텐트에서 살고 감기에 걸렸느냐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죠.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문명 때문도 아니죠. 정말 불공평해요. 담배였어요. 기내에서 많은 사람이 흡연했는데, 그것도 내 『건강』에 기여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