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은 동물 주민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보다 병에 덜 걸리죠. 그러니 비건이 대신 보호해 주고, 마음이 차분해져 잡념도 줄어듭니다. 그게 비건식의 장점이고 또한 자비심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용서하고 다른 생명을 빼앗지 않기에 우리의 생명도 위태롭지 않아요. 이해하겠어요? 그게 업의 법칙, 인과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면 남도 우릴 용서하죠.
우리는 자기 수행력과 진동으로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죠.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더 높은 힘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점차 그렇게 될 거예요.
대만(포모사)에서는 많은 사람이 입문한 후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했지만, 입문자들이 인내하고 사랑하며 일정 기간 수행한 후에는 가족들이 변화와 유익함을 느꼈어요. 그들도 모두 입문하게 됐죠. 전에는 자녀에게도 반대하며 또한 스승도 반대했지요. 심지어 내게 와서 온갖 물건으로 위협하고 갖은 방법으로 내 사명을 방해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온 가족이 와서 입문했죠. 그들을 바꾸기 위해 날거나 사라질 필요는 없어요. 나는 보이지 않는 타고난 사랑의 힘을 사용하며 그걸 쓰지 않기도 해요. 그것은 거기 있으며 24시간 흐르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걸 얻고, 감사하며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귀의자가 되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훌륭함을 증명하는 거예요. 많이 논쟁할 필요가 없죠. 말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이 잃어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두 마디면 충분해요. 하지만 우리는 빛의 전달자가 돼야 해요. 사랑과 인내와 지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들이 그 냄새를 맡고 자연히 찾아올 겁니다. 말없이 자신의 향기와 꿀로 벌을 끌어들이는 꽃처럼요.
이제 날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그렇게 하는 걸 볼 수도 있어요. 사실 여러분은 그걸 종종 볼 수도 있지만, 당신 아버지가 개심하도록 그렇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가 자신의 지혜와 자유의지로 개심한 후에 그걸 볼 수 있겠죠. 개심시키기 위해 하진 않죠. 그건 내 방침과 신의 명령에 반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스승은 자신이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신통력을 써서는 안 됩니다. 증명하면 할수록 그는 더 작아져요. 태양은 아무 증명도 필요 없이 그냥 빛납니다.
눈이 있는 사람은 보겠죠. 눈먼 사람이라면 논쟁할 필요도 없죠. 눈먼 사람이라면 그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도 얼굴에 햇빛을 느끼고 혜택을 받을 겁니다. 날아다니는데 이 육신을 사용하지 않아요. 스승은 언제, 어디나 존재할 수 있어요. 하늘을 날아가고 연꽃을 타고 날아가고 천국과 지옥으로 날아가고 전 세계를 날 수 있죠. 언제 어디서나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치한 재주이며 스승이 어디든 가서 도움이 필요한 제자나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구제하고 돕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입니다. 그걸 보여줄 것도 없고, 얘기할 것도 없어요. 모두 사소한 행위죠.
사라지는 것은 지금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의 눈이 너무 가려져 있기에 내 육신만 봅니다. 다른 건 보지 못해요. 정말 지혜안이 열렸다면 말하고 있는 나를 못 볼지도 몰라요. 이 방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도 못 보고 빛만 볼 겁니다. 이 빛 속에서 심지어 모든 청중도 사라질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라짐이죠. 어떤 내 사진을 보면 나는 안 보이고 거기에 빛만 보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 스승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빛만 보입니다. 사람은 사라지죠. 대부분의 내 사진이 그래요. 그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더는 증명할 필요가 없고 카메라가 증명해요. 때로는 단상에 스승이 없어요.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죠. 실제로는 스승도 없고, 아무도 없고, 중생도 없고 존재도 없고 오직 빛, 진동, 사랑, 함께하는 느낌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됐죠? 다들 나는 것만 좋아하고 수행은 안 하죠.
나와 함께 수행하면 얼마 안 있어서 내가 날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약속하죠. 어렵지 않아요. 당신이 수행하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해요. 여러분이 보라고 우리가 서커스 하는 게 아녜요.
『제가 당신의 모든 축복을 받고 지금의 저나 저보다 못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축복받는 법은 자기 내면의 힘으로 스스로 축복하는 겁니다. 나는 그 방법을 알며 그것을 알려줄 수 있어요. 자신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축복할 수 없어요. 그분은 도울 수만 있죠. 그분은 당신을 더 높은 의식으로 끌어 올리려고 자기 자장, 사랑과 힘의 일부를 빌려줄 수 있지만, 당신 자신의 힘으로 기꺼이 자신을 축복하지 않는다면 완전하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예수님이 온 세상을 축복하셨겠죠.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서 기어다닐 필요도 없죠. 안 그러면 부처님이 적어도 인도 전체를 축복하고 그들을 열반으로 데려갔겠죠. 여러분이 보듯이 부처님은 부처가 됐지만, 인도 사람은 대부분이 여전히 무지해요.
아무도 누굴 축복할 수 없는 게 확실해요. 스승이 지상에 오면 그분은 신에게서 큰 축복을 가져올 것이며, 그분이 사는 곳이나 가는 곳마다 그 축복의 힘이 흔적을 남겨 태도와 의식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건 작은 부분일 뿐이고 각자가 자신을 축복해야 해요. 그래야 해요, 미안해요.
『그게 무엇인가요?』 스모, 스모 선수? 『스모가 부처인가요? 어떻게 하면 스모 선생이 될 수 있을까요? 자존감이 무엇인가요? 사람은 종교 없이 살 수 있나요?』
스모가 뭔가요? 뭐죠? 모르겠어요; 스모가 뭐죠? (일종의 무술입니다) 무얼 하는 것이죠? (씨름입니다) 씨름이요 (네 씨름이요) 스모가 부처인가요? (물론 아니죠) 네. 그에게 불성이 있지만, 부처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미안해요. 오래 걸렸네요.
자존감이란 자기 존중이며 자기 장점이 무언지 알고 자신을 존중하는 거죠. 하지만 이것은 어려워요.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려면 내면의 위대한 힘을 알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사람이 종교 없이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죠. 예 대부분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깨닫는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며 그저 교리만 외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은 사람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전도하면서 예를 들면 개신교와 싸우고 있어요.
모든 기독교인이 그런 것은 아니며 내면에 인내력이 부족하고, 진정한 신의 힘이 부족하여,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종교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살면 되고, 종교 없이 살고 싶다면 없이 살면 됩니다. 어쨌든 좋은 사람이 되고,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종교인이죠. 어떤 종교 단체에 속해 있든 아니면 종교가 없든, 선한 사람 즉 훔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좋은 시민이 되려는 자는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중국어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깨달았으며 말씀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스승에게 배웠습니다』 (말씀을 얻고, 배웠습니다…라고 하네요) 『말씀을 얻었고, 스승에게 배웠습니다』 고마워요.
『왜 이렇게 신과 분리된 걸까요?』 그래요. 내가 말했죠: 우리가 너무 바빠서죠. 누가 당신과 전화로 통화하려고 하며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데 당신은 요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과 연락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마찬가지예요. 신께서 매일 매 순간 전화하셔도 당신은 신과 대화할 시간이 없어요. 신이 계속 전화를 들고 기다리니 그렇게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제 신과 다시 하나가 되고 싶다면, 시간을 내어 하루의 10분의 1을 신과의 소통에 할애하세요. 그러면 분명히 더는 분리가 없을 겁니다.
『명상 중에 하얀빛을 볼 때?』 이건 이미 답했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우리는 모두 태초에 말씀이나 부처의 이름, 신성에서 분리되었을까요?』 단언컨대 우리는 분리된 적이 없어요. 우린 그 안에 있어요. 안이든, 밖이든 뒤집어서든, 거꾸로든 우리는 모두 이 신과 불성을 갖고 있죠. 다만 너무 바쁠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의무와 일에 눈이 멀어서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령 때로는 머리에 안경을 걸치고 안경을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네, 그와 유사합니다.
너무 바쁘다 보면 많은 일을 잊지요. 때로는 너무 바빠서 사랑하는 사람이 와도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혹은 텔레비전을 켜놓고 딴생각하느라 바빠서 드라마를 보지도 못합니다. 아니면 옆 사람과 대화하느라 텔레비전 내용이 뭔지 모릅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신이 있어도 신을 볼 시간이 없으면 확실히 신을 못 보죠. 그런 거예요. 이제 내가 여러분을 이 말씀 또는 신과 다시 하나 되게 할 수 있죠. 그 이유를 묻지 말고 다시 하나 될 방법을 물어요?
이제. 『우리가 당신의 모든 규칙을 따를 수 없고, 지금 입문하지 않기로 했다면, 우릴 위해 전할 수 있는 명상법이 있습니까? 때론 제 마음이 방황하거나 과거의 일에 계속 매달립니다. 지금 입문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나요? 또한 비건이 되어 신체가 정화되면 대기 오염이나 다른 순수하지 않은 물질과 깨끗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민감해지지 않을까요? 시골에 살 때는 그다지 스트레스가 많지 않지만, 도시 생활은 많습니다. 어떻게 정화해야 압도되지 않고 취약해지지 않죠? 당신의 입문은 뭔가요?』
이런 질문들이죠: 네, 다른 명상법이 있어요. 그 사람 여기 있나요? 가능한 한 비건을 하려고 노력할 수 있어요. 오염된 지역에서도 그것이 도움이 될 겁니다.
비건이 되면 더 확실해요. 비건은 동물 주민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보다 병에 덜 걸리죠. 그러니 비건이 대신 보호해 주고, 마음이 차분해져 잡념도 줄어듭니다. 그게 비건식의 장점이고 또한 자비심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용서하고 다른 생명을 빼앗지 않기에 우리의 생명도 위태롭지 않아요. 이해하겠어요? 그게 업의 법칙, 인과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면 남도 우릴 용서하죠. 그러면 우리 마음이 더 평화로워지죠.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평화로워지죠. 이것이 비건에 대한 아주 논리적 개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