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이요. 『허나 육체는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순수한 빛이 몸 속으로 흘러 넘친다」고 하느니라』 몸 안에서도 흐릅니다. 눈 앞에서만이 아니라 몸 속으로 흘러 들어 강하게 흐릅니다. 그래서 그걸 일컬어 「흘러 넘친다」고 하죠. (내면의 천국의) 빛이 몸 속에서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요충이나, 해충이나, 어떤 박테리아도 견딜 수 없는 것이죠. 그 빛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사라지거나 타 죽어요. 눈 앞에 있는 빛을 보는 건 아마 다를 겁니다.
이 두 번째 경계에서는 빛이 이미 여러분의 몸 전체에 스며들어 몸 전체로 흐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견디지 못하죠. 좋은 것들만 남고 고양되기만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거죠. 그런 빛을 보면, 명상할 때 빛을 보면 정말 기쁨에 넘치고 마치 몸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모든 나쁜 요소들이 씻겨졌기 때문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 느낌이죠. 그래서 기분이 좋죠. 여전히 걷긴 걸어도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거죠. 네, 여러분도 알고 있죠. 여러분 중 일부는 압니다. 그렇게 멋집니다.
『집중 수행 과정에서 만나는 일시적 경계다』 그때도 주의하세요. 깨달음의 일시적인 경계입니다. 깨달음이 아니란 게 아녜요 깨달음이지만 아직은 아니란 거죠. 그저 초보단계예요. 여러분은 몸에 들러붙은 요충, 해충, 박테리아 등의 형태로 드러난 인과응보를 이미 자신의 몸에서 씻어냈습니다. 『허나 성인이 된 증거는 아니다.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은 경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보한 것이지만 성인이라 여기지 않으면 괜찮죠. 아마 미쳤을지도요. 그래요, 왜냐하면 너무 행복하게 느껴지니까요.
여러분이 행복하게 춤추고 늘 혼자서 웃으며 불찬과 찬송가를 부르는 걸 사람들이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오, 이 사람은 미쳤군 혼잣말을 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즐거워하며 춤을 추네』 다른 사람들을 껴안거나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지 마세요, 알겠죠? 이 세상은 이런 황홀경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하지 않죠. 너무 자유자재한 거죠. 옷을 다 벗어버리고 혼자 춤을 출지도 몰라요. 가능해요! 그럴 수 있죠.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게 되거든요. 옷이나 뭐 그런 것을 벗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거죠.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그처럼 단순한 거예요. 어린애와 같은 거죠. 옷을 입고 싶지 않으면 그냥 벗어버려요. 아무 생각 없죠. 단지 우리가 자라서 약간 판단력을 갖게 될 때 이런 옷 저런 옷을 입는 거죠. 하지만 옷을 입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경찰이 옷을 입히려고 들 거예요. 옷을 입지 않으면 경찰이 뭔가를 채울 거예요. 그렇죠? 그래요. 그게 이 세상의 문제죠. 하지만 어린아이가 옷을 입지 않는다고 누군가 혹은 경찰이 와서 수갑을 채우거나 하진 않아요. 그렇죠? 어른이 됐을 때만 그래요. 차이가 뭔가요? 남자 아이일 때는 그저 모든 게 크기가 작을 뿐이죠. 그래도 옷을 입지 않아요. 그런데 좀더 커서 옷을 입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건 왜일까요?
성 프란체스코는 아직 수도자일 때 때때로 밖에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모든 걸 다 벗어 주고 그 상태로 그냥 집으로 걸어왔어요. 그러면 다른 수도자들이 그를 나무랐죠. 『망측하고 나쁜 행동이에요. 나빠요. 이게 뭡니까?』 그는 말했죠 『이게 나쁜 건 줄 몰랐습니다. 누가 헐벗고 있길래, 어떤 불쌍한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길래, 옷을 주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베풀어야 하잖아요?』 아주 천진난만하게요. 그가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마음의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때때로 공중부양을 하기도 했죠. 그의 몸이 교회 꼭대기까지 떠올랐어요.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그런 마음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어쩌면 그가 이런 힘을 얻어서, 원하지 않는데도 공중부양을 할 수 있었던 거겠죠.
지난 번 일요일인가 내가 말한 적이 있죠. 나도 그 모든 걸 할 수 있었지만 여기 있기 위해 교환해야 했죠. 모든 걸 교환했어요. 여러분 앞에 앉아 있는 아주 무력한 보통의 인간이 되는 걸로요. 지혜나 힘이 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이 보는 건 전부 내면에서 오는 것뿐이죠. 내가 가진 걸 세상에 보여줄 순 없어요. 내 생각에 예수가 죽은 자를 살려내거나, 장님이 눈뜨게 하거나, 병든 자를 낫게 하지 않았다면, 눈에 띄는 그 모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일들은 심하게 업에 개입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물리적으로 바깥 세상에서 이런 힘을 쓰지 않죠. 물론 도술사 등은 이런 힘을 씁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요. 그들은 다시 돌아올 거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죠. 마야가 그들을 쫓아다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내려온 스승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에 자신의 힘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서명했는데 그렇게 한다면, 그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한 목숨을 구하면 자신의 목숨으로 갚아야 하죠. 다른 이들과 같아요.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 당시엔 모두 그렇게 해주길 원했어요.
예수의 어머니조차 그가 신통을 부려 물을 포도주로 바꾸게 했죠. 예수는 원치 않았어요.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죠. 『어머니, 왜 내게 이런 걸 강요하셨습니까?』 그의 어머니는 과시하고 싶어했죠. 또 예수가 병을 낫게 해주길 사람들이 기대했거나 몇몇 제자들이 그를 부추겼겠죠. 『스승님은 그 모든 걸 할 수 있어,보여줄 테니 병든 자를 데려와 봐! 고쳐주실 거야』 그들이 너무 열성적이었던 거죠. 갓 입문한 사람처럼요. 온 세상에다 자기 스승이 정말 위대하고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건 내면의 일이죠.
하지만 손을 얹어서 누군가를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허나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마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경계죠. 아직 마의 영향을 받죠. 에고가 여러분을 속여서 여러분이 이미 부처가 됐다는 등의 말을 하면 그 땐 문제가 생기죠.
그저 자신만 보세요. 다른 사람은 보지 말고요. 심지어 누가 여러분을 죽이러 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에고를 조심하세요. 우리에게는 에고가 최악의 적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죽이면 아마도 죽겠죠. 괜찮아요. 그럼 다시 돌아올 테고 그때도 이 깨달음의 힘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또 다른 스승과 연결될 겁니다. 여러분의 경지가 이미 높기 때문에 스승을 찾기 쉬울 겁니다. 여러분은 스승을 찾아야 한다는 걸 이해할 것이고 그를 찾았을 때 즉시 알게 될 겁니다. 마지막 생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진 못했어도 이미 그 길에 들어섰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 미아오리에 가는 걸 물으면 그가 알려줄 거고 그럼 여러분은 압니다. 『오 그래, 그곳이 내가 가고 싶은 장소야』 그리고 그를 따라가겠죠. 하지만 에고가 여러분을 잘못 이끌면 스스로 현자나 아주 높은 수준의 성인이라 생각하게 되고 그럼 마귀들이 와서 그걸 이용해 여러분을 해칠 수 있어요.
영적인 손실은 무수한 육신의 죽음보다 안 좋죠. 그걸 다시 되찾기가 너무 힘듭니다. 스승을 찾는 것조차 너무 어렵죠. 그래서 영적인 힘을 잃는 것이 훨씬 더 안 좋아요. 그러면 스승을 못 찾죠. 이제는 너무 흐려졌기 때문이죠. 스승을 찾아야 한다는 그런 것들을 이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저 육도 윤회의 길에서 완전히 헤맬 겁니다. 스승을 찾아야 한다거나 어떤 영적인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완전히 망각합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난 여러분이 지옥에 가는 걸 원치 않아요.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은 스승 이름도 모르고 그 상황에서 도와 달라고 부를 그 누구의 이름도 알지 못할 겁니다. 이미 운이 다했고 끝장났기 때문이죠.
이제 세 번째 경계예요. 부처는 더 묘사했어요.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으로 내면과 외면을 골똘히 연구하면 혼백과 지능과 의지와 정신과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주지 않고서도 서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와, 이건 또 하나의 경이로운 경계입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주인이나 손님이 된다. 그때 홀연히 공중에서 설법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부처의 제자들 중 몇몇은 그 당시 이런 걸 들었죠. 아마 여러분 중 일부도 들을 겁니다. 명상할 때 어디선가 설법하는 소리가 들리죠. 마이크나 전축이나 비디오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텅 빈 숲 속에 앉아 있어도 설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부처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고, 예수나 다른 스승일 수도 있어요. 이 또한 놀라운 경지죠.
『혹은 시방에서 동시에 은밀한 진리를 말하는 것도 듣게 되리니 이 단계를 「정신과 혼백이 번갈아 가며 떨어졌다 합쳤다 하면서 착한 종자를 심는 것」 이라 한다』 그게 세 번째 경지예요. 긴 경지입니다. 『일시적인 경계일 뿐 성인의 증거는 아니다』 성인의 경계가 부처의 경계를 의미하진 않죠. 아마 한 단계 낮은 보살쯤 될까요. 그래도 성인, 현자죠. 『성인이 되었단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은 경계라 할 수 있다』 한 단계 위입니다. 『허나 스스로 성인이라 생각한다면 마귀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위하고 같습니다.
좋아요, 다음 단계, 내 달력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어요 오늘은 읽기만 해요 잘하고 있죠.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이…』 정말로 그냥 읽기만을 원하나요? 읽기만요? (아뇨) 아니라고요? (설명해주시는 게 좋아요) (저희는 설명해주시는 게 좋아요) 설명이요? (네) (달력 토크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달력이요, 알았어요. (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내 사랑. 그냥 얘기하는 거죠. 사실 솔직히 그냥 여러분을 즐겁게 해 주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이해하고 얼마만큼 믿고 얼마만큼 행할지 모르겠어요.
사방에서 목격했죠. 내가 가르치는 많은 작은 것들을 안 지켜요. 계율을 말하는 게 아녜요. 예를 들면 환경에 관한 것들이요. 여러분이 경청하고 이해한다면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소대로 하는 거죠. 이 말법 시대에 여러분에게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아요. 그리고 부처는 이미 너무 멀리 있죠.
작은 것들, 가령 화장실 휴지를 쓰지 말라고 했죠. 물과 비누를 쓰라고요. 가벼운 유기농 세제무독성 세제를 사용해 씻으라고요. 일부 제자들 집에서는 그런 걸 볼 수 없어요. 그들이 날 위해 어딘가에 작은 방을 만들었죠. 전에 내가 지내던 곳에요. 내가 처음 머물던 곳은 산이었어요. 그때는 돈이 별로 없었죠. 땅을 조금 사서 그곳에 텐트를 쳤어요. 아주 오래 전 일이죠. 그 후, 그들이 날 위해 작은 집을 지었는데 화장실에 분무기를 달지 않았어요. 그 분무기가 있으면 변기 안쪽의 오물을 씻을 수 있고 집을 더 깨끗하게 할 수 있는데 그게 없었어요.
다행히 난 알고 있었죠. 난 내 제자들을 알아요. 내 것이 있었어요. 여러분이 병 같은 걸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같지는 않죠. 변기에 붙어있는 분무기로 씻는 것 만큼 깨끗하고 편리하진 않죠. 이만큼 길고 헤드 부분이 작은 분무기요. 샤워기 헤드처럼 크지 않고 더 작죠 아주 작죠. 주변도 쓸어 내리고 몸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죠. 환경에도 좋고요.
많은 나무들을 살리죠. 휴지에 죽은 나무만 사용하는 건 아니니까요. 나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사용할 정도로 시간이 많진 않죠. 아무 나무나 쓰죠. 수십억 인구가 각자 매일 휴지를 조금씩 쓴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나무가 죽어 변기 속으로 내려갔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었을까요? 지구에 얼마나 많은 오염을 가져 왔을까요? 휴지들을 하얗게 하려고 표백제를 쓰니까요. 더 깨끗하게 보이게요. 하지만 표백제가 어디로 갈까요? 알고 있죠? 강과 바다로 흘러 갑니다. 그러면 서서히 강은 오염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바다는 죽게 되죠.
돈 문제만이 아닙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문제만이 아니에요. 여러분과 세상과 아이들 세상에 관한 거죠. 이건 사소한 것이고 아주 편리하죠. 배관공을 부르기만 하면 금새 달아 줄 겁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나도 혼자서 할 수 있었죠. 여러분 전부 그렇다는 게 아녜요. 일반적으로 『여러분』이라 하죠. 일부는 설치한 걸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만(포모사)의 한 의사에게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우린 더 이상 휴지를 사용하지 않아요』 했죠.
하지만 정작 내 집의 도우미들은 쓰고 싶어해요. 그래서 내가 휴지를 전부 치워서 한군데 쌓아 놓았어요. 난 말했죠. 『더 이상 쓰지 말아요. 이제 내가 쓰라고 한 것만 쓰세요. 만약을 대비해 휴지는 거기 두세요』 이미 구매한 거니까 다른 데다 쓸 순 있어요. 바닥에 흘린 걸 닦거나 하면서 없어질 때까지 쓰는 거죠. 혹은 코를 풀거나 할 수 있죠. 하지만 더는 구매 안 해요.
지금도 내 집에서, 소위 내 집에서 아직도 그들은 키친타월을 사용해요. 그건 최악이죠. 끝도 없이 표백해요. 아주 더럽습니다. 그걸 부엌용품이나 그릇을 닦는데 쓴다면 여러분에게 정말 좋지 않습니다. 아주 나빠요. 정말 급할 때만 쓰세요. 다른 게 없고 어쩔 수 없을 때만요. 아니면 쓰지 마세요. 차라리 내 몸에다 닦겠어요 정말이에요. 이 키친타월은 눈처럼 새하얗고 깨끗해 보이지만 아주 더러워요. 수많은 화학약품들이 들어가고 환경에 정말 안 좋아요.
난 압니다. 알겠어요? 그들에게 좋고 환경에 좋다 해도 모두가 내 말을 듣는 건 아니죠. 환경을 보호하면 공덕도 쌓여요. 주머니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나무와 지구도 보호하는 겁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감사하며 축복을 주죠. 나무와 환경을 죽이고 종이를 하얗게 표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박테리아를 죽이는 업을 받지도 않고요.
난 내가 경험하고 실천하는 걸 가르쳐요. 뭐가 좋은지 알죠. 여러분께 뭘 하라고 말만 하고 난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죠. 나도 똑같이 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듣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난 너무 바빠요. 내가 일일이 쫓아 다니며 『누가 이랬지요? 누가 휴지를 뒀나요? 빨리 바꾸세요』라고 말할 순 없어요.
때론 정말 과합니다. 난 그걸 쓰지도 않아요. 난 그걸 안 써요. 수건이 하나도 없다면 내 깨끗한 옷으로 필요한 곳을 닦습니다. 샤워 후나 뭔가 젖었을 때 난 내 더러운 옷으로 화장실 바닥을 닦아요. 종이타월은 쓰지 않아요. 깨끗한 수건도 쓰지 않죠. 그럼 두 번 빨래 안 하죠. 어차피 내 화장실은 깨끗하니까요. 물하고 약간의 비누만 묻어 있죠. 그래서 갈아입은 옷을 가지고 닦습니다.
나는 또 모든 걸 다음 세대를 고려해서 합니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하지 않아요. 그러지 않습니다. 또한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