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턴 신부는 가톨릭의 중요한 신비적, 영적 사상가로서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15년에 태어났습니다. 수도사 생활 동안에 토머스 머턴은 종교적 글을 번역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문능력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영성,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주제로 시와 책,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머턴의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성자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종교의 평등함을 믿는 토머스 머턴은 만년에 선불교 같은 동양의 전통에 깊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또한 14대 달라이라마와 활발한 담화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켄터키 주의 토머스 머턴 센터와 국제 토머스 머턴 협회와 다른 단체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들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토머스 머턴의 저서 『동양의 사상들』에서 선의 정수에 관한 그의 관점을 발췌해서 보내드립니다.
선에 관해서
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선사들의 간결한 일화를 읽는다면 이것이 위험하게 놓여진 질문이란 걸 알 겁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선 전통이 어떤 추상적이나 이론적 답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두에 말해야 했는데 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말한다면 어쩌면 그 문제엔 만족스런 답이 없습니다. 선은 논리적 분석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선이란 말은 중국어에서 유래했는데 특정한 명상 유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선은 명상 방법이나 영성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이고, 경험, 삶이지만 그 길은 역설적으로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며, 사색의 방법이 아니고, 교리나 고행이 아닙니다.
모든 불교와 마찬가지로 선도 깨달음을 추구하며, 이는 모든 주체와 객체 관계의 해답이며, 순수한 공에 반대입니다. 그러나 이 공을 단순한 부정이라 부르면 그 안에서 해결한 대립을 다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선사들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독특한 어법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단순히 조용한 무위나 사고의 억제로 얻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깨달음은 경험이나 사고의 활동이나 자의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처의 환시나 또는 지고의 존재를 나와 너의 관계에서 지식과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체험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지만 선은 지고의 존재를 부정하도 않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합니다.
선은 주체와 객체를 넘어 순수한 존재의 존재론적 각성이고, 그 본질과 진여의 즉각적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깨우침의 특성은 반사하지 않고, 자의식이 아니며, 철학적이 아니며, 신학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리적 관찰과 형이상학적 숙고의 범위를 완전히 초월한 것입니다. 더 나은 용어로 「순수하게 영적」이라 하겠지요. 이 순수한 영적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사들은 선의 체험을 논리적으로 만들거나 말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모든 마음의 상상이나 공상이 그 뜻을 전하려는 걸 끊임없이 파괴합니다. 그들은 이론적이나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기를 거절하는데, 아주 사소한 말과 질문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쫓아버리는 말만 예외로 합니다.
「만일 모든 현상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물으니 조슈 선사가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이쥬에 살 때 삼베로 가사를 만들어 무게가 10근이었다」 서양의 독자들은 이것을 유익하고 효과적인 말로 기억합니다. 이것은 관념적 용어로 선을 생각하려는 참을 수 없는 대부분의 유혹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선은 범신록적 일원론(자연은 완전하다는 믿음)의 학설이 아닙니다. 어떤 학설이 아닙니다. 존재와 실존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한 어떤 설명도 거부합니다. 차라리 추론에 빠지지 말고 존재 자체가 되라고 직접 가리킵니다. 선의 통찰력은 달마대사가 지적하듯이 마음 또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직접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직접 이해는 모든 관념적 매개물이나 방법을 거부하며 무심으로 마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마음을 갖는 대신에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선의 깨달음은 만물의 존재적 실체와 실현 안에서 존재를 꿰뚫는 통찰입니다. 완전히 깨어있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초의식적 행동입니다. 그것이 부처의 마음, 또는 불성을 이룬 것입니다. 선의 통찰은 개인적 자아의 한계로부터 즉시 해방이고 인간의 본성과 마음의 본래면목을 발견하는 것인데, 더 이상 경험적 자아에 한정되지 않고 만물의 안과 위에 존재합니다.
선의 통찰은 우리의 자각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의 각성입니다. 범신론에 잠기거나, 본성이나 신 안에서 우리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적 본질로 물러나서 물질과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온 세상이 내 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는 더 이상 나의 개체와 제한된 자아가 아니고, 육체가 없는 영혼이 아니며, 나의 존재를 만물과 분리된 속에서 찾지 못하며, 그 모든 것과 하나됨에서 찾는 걸 인식하는 겁니다. 나의 존재는 개인의 실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가장 높은 확인입니다. 내면에 신과 함께하는 진정한 나의 존재의 발견입니다.
한 스님이 명상에 매우 열심인 제자를 보았습니다. 스님이 말하기를 「용감한 제자여, 참선을 수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제자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기와를 주워 들고 암자 앞에서 바위에 갈기 시작했습니다. 제자가 말하기를 「스님, 무얼 하십니까?」스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거울을 만들려고 이 기와를 갈고 있다」 제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기와를 갈아 거울로 만듭니까?」그 스님이 답했습니다. 「어떻게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겠느냐?」 다른 선사인 웬우가 말합니다. 「모든 갈망을 멈추라. 당신 입술에서 곰팡이가 자라게 하라. 자신을 순백의 천으로 만들어라. 한 생각이 영원이 되게 하라. 자신이 죽은 재처럼 차고 생명이 없게 하라. 다시 한번 당신 자신이 황폐한 마을의 묘에 있는 낡은 향로처럼 되어라.
여기에 단순한 믿음을 두고 자신을 적절히 훈련하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이나 나무 조각 같은 자연의 무생물로 바꾸어 보라. 완전한 부동과 비각성의 상태에선 생명의 모든 징후가 없어지며, 또한 한계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것이다. 단 하나의 관념도 당신 의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갑자기 당신은 충만한 기쁨 속에서 풍성한 빛을 깨닫게 된다. 마치 캄캄한 어둠에서 한줄기 빛을 만난 것 같다. 마치 가난 속에서 보물을 받는 것과 같다. 4대 원소와 오온은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고 매우 가볍고, 쉽고, 자유롭다. 당신 존재가 모든 제약을 넘어선다. 당신은 열리고, 가볍고, 투명하게 된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얻어 이제 명확한 실체가 없는 많은 동화 같은 꽃들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순수한 자신이 드러나며, 이는 당신 존재의 본래면목이다. 여기서 당신이 나온 곳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곧은 통로가 있으며 막힘없이 쭉 펼쳐져 있다.
이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자신의 육신과 생명 가장 깊은 자아에 속한 모든 걸 포기할 때이다. 여기서 평화와, 안락함과, 무위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다. 모든 경전과 학술서적(종교적인 책들)은 더 이상 이 진실을 전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자들은 자기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다른 목적보다는 그 길을 밝히는데 쏟았다. 이것은 보물창고의 문을 열쇠로 여는 것과 같다. 한번 들어가면 당신이 보는 모든 대상이 당신 것이다. 스스로 나타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본래 존재에 있는 모든 재산을 얻을 수 없다면 무엇 소용인가? 그곳의 모든 보물은 당신의 기쁨과 사용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고 시간의 끝까지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얻는 것은 없다. 당신이 얻은 것은 얻은 것이 아니지만 그 안에 참으로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